증산도와 보천교

이모저모 2016. 11. 15. 09:00

 

 

 

증산도와 보천교

 

 

 

 

 

 

 

 

 

일제시대 600만이 믿었던 보천교

이때 조선의 인구는 1800만명이었는데 600만명이

보천교를 믿었다고 하니 믿기지 않을만큼 굉장한 숫자입니다.

인구의 3분의 1이 믿었으니 말이에요.

이 보천교가 지금의 증산도랍니다.

 

이 자료는 미 국무성 밀러 보고서에 나온 내용인데

당시 보천교 신도가 6백만명이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천교를 믿었던 6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간것일까요?

 

그 이유는 김구선생의 발언에서 답을 찾을수 있어요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

김구선생은 해방후 입국한 직후에 한 말이에요

 

일제시대때 신도가 600만이었던 보천교는 항일 독립자금을 대는

독립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은뒤 김구선생은 귀국하자마자

보천교 본부가 있었던 정읍을 방문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고 연설을 한것입니다.

 

 

 

 

 

 

 

 

 

보천교에서 독립자금을 지원한 자료가 있는데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2만원을 지원했다는 내용입니다.

 

 

 

 

 

 

 

 

 

 

독립군들은 수시로 정읍 보천교에 와서

군자금을 받아갔던 것입니다.

아래 동아일보에 실린 내용을 보면

보천교에 군자금 모집하러 왔다가

정읍경찰에 잡혔다는 기사가 나와있습니다.

 

 

 

 

 

 

보천교(지금의 증산도)에서 군자금이 지원되었다는 기사가

건건이 기사가 난건 아니지만 기사에 난것만 보더라도

여러번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어요.

 

 

 

 

 

 

 

 

 

또한 조선일보에 실린 항일기사에 대한 내용을 보면

종교별로 분석을 한것인데 유독 보천교가 많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러니 일본이 보천교를 그냥 둘리가 있겠어요.

민족말살 정책과 함께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면서

군자금을 대는 보천교를 무력으로 해산시키게 됩니다.

 

한민족의 역사 뿌리를 자르기 위해 한국의 자생종교를

유사종교, 사이비 라고 탄압했던 것입니다.

그 때 일제의 한마디 '사이비'가 우리것을 사이비로

인식하게 하고 비하하게 했던것입니다.

 

 

 

 

 

 

 

 

증산도의 모태가 되는 보천교

역사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Posted by 상생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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